아이는 커서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엄마를 다시 지금의 나이로 만들고 자기도 지금의 나이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늙어서 할머니가 되면 슬퍼할 테니까, 그리고 엄마는 지금의 자신을 너무나 귀여워하고 사랑하니까, 자기가 과학자가 되어서 엄마와 자기를 지금 이 시절로 돌려놓겠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장래희망은 지금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의 이 이야기가 너무 감동적이고도 미묘하게 느껴졌다. 흔히 우리는 장래희망을 물으면, 먼 미래를 상상하며 그때 이룰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이에게는 미래의 그 어떠한 대단한 삶도 지금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상상'에 불과했다. 미래로 가서 가장 하고 싶은 건 현재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 강렬하게 현재를 긍정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이는 점점 크고 있고, 내년이면 학교를 간다. 여전히 아이는 우리에게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아이도, 우리도 한 시절이 끝나간다는 걸 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 아이 무렵의 기억이 거의 나질 않는다. 물론, 유치원 다닐 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다 모아도 몇 조각이 되질 않는다. 아이도 어쩌면 이 시절을 두고 떠난다는 걸 직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득, 만약 내가 죽고 아이에게 아주 좋은 새아빠가 생긴다면, 아이가 나를 얼마나 기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이는 어린아이다운 적응력으로 새아빠와 사랑을 듬뿍 주고받으며, 어릴 적의 아빠를 거의 잊어버릴 것이다. 어렴풋하게 기억은 나겠지만,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이와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다. 장래희망이 다시 이 시절로 돌아오는 것이라 말하는 아이는, 아마 과학자가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 자기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 우리는 지금을 너무도 사랑하고, 놓지 않고 싶고, 미래에도 다시 돌아오고 싶지만, 미래에는 미래의 현재가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새로 받아들여야 할 삶, 새로 사랑할 것들, 현재를 채우는 또 다른 의미들이 있을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보내며, 또 사랑하고, 그럼에도 또 사랑하는 일 같다. 우리 둘 사이에 누워 깔깔대며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이 아이는, 그 웃는 얼굴의 기억 한 조각을 남긴 채, 자기 방의 자기 침대로 먼저 독립을 할 것이다.
문득, 내가 그토록 사랑하여서, 어느 날 날벼락같이 세상을 떠나자, 몇 달을 펑펑 울게 만들었던 나의 강아지 '바다'가 생각난다. 그때의 상실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어떤 연인과의 이별보다도 더 큰 슬픔을 나에게 주었던 터였다. 그러나 이제 그 바다를 사랑하여서 울던 마음도 잘 기억나질 않는다. 그 사이 나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절을 맞이하며, 내가 사랑하던 날들의 마음을 어렴풋이 기억하는 그런 현재로 걸어 들어왔다.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 사랑하고, 모든 시절을 떠나보내며, 새로운 시절을 맞이하고, 사랑하다, 언젠가 이 생을 접을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장래희망은 이 삶을 다시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괴로움과 사랑을 또다시 살자, 그것이 나의 장래희망이다.
[출처]
정지우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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